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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저술

​옛 노래의 향기
  • 작성자admin
  • 날짜2017-01-10 17:43:28
  • 조회수215


상상과 현실 속의 향가


 “그러면 향가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3년 전 신임교수 오리엔테이션 때, 곁에 자리하신 선생님께서 말씀을 청하셨다. 법학을 전공하신다는 그 분께서는 곁에 앉은 사람이 향가 전공이라니 처용과 서동의 정체, 기파랑의 행적 등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놓으신다. 문답은 어느새 멋쩍은 침묵을 물리치는 인사치레 수준을 넘어 향가와 그 배경담의 몇몇 구절까지 외워가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결국 짧은 시간에 ‘하나의 정답’에 속 시원히 이르지는 못했다. 그 때 채 못 드렸던 말씀을 덧붙인다기보다는, 처음 관악에 왔던 무렵의 초심을 되살리기 위해 몇 자 적어 본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서 역신(疫神)을 물리쳤다는 인물인데, 그 정체에 관하여 아라비아 상인, 호족의 아들, 무격(巫覡)의 시조 등 여러 설이 있다. 이 가운데 처용을 아라비아 상인으로 본다면 동서 교류의 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성격의 해외 교류는 비단 처용만 있지 않고, 가야사 초엽 김수로 임금과 허황옥의 첫 만남, 해외에서 도래하여 신라 임금이 된 석탈해 등 고대사의 여러 때와 장소에서 확인된다. 한편 처용이 울산 호족의 아들이었다면, 그 당시 정치 상황을 재구성하여 역사를 바탕에 둔 서사를 구상할 수 있다. 훗날 후삼국에까지 이어지는 지방 세력의 반항과 봉기를 돌이켜보면, 이 경우의 처용은 만만치 않은 격동기를 예고하는 한 단서가 된다. 끝으로 처용을 용왕의 아들로서 무격의 원조라고 간주한다면, 이를 토대로 팩션(faction)의 영역 혹은 판타지 소설의 소재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이들 여러 상상 가운데 굳이 어느 쪽만 단 하나의 사실, 정답으로 인정하고 다른 것을 버릴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보다는 이런 다채로운 빛깔의 상상이 가능했던 것 자체가 고대 한국문화의 힘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얼마 전부터 서동의 아내, 신라에서 백제로 시집 왔다는 선화공주가 실제로 있었는지 의심을 받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선화공주가 창건했다던 미륵사 탑의 사리장엄이 발굴되었는데, 그 안의 봉영기(奉迎記)는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를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선화공주 관련 전승을 아예 폐기하자는 입장도 생기고, 백제왕후가 여럿일 수도 있다며 어떻게든 선화공주를 살리려는(?) 쪽도 있다. 그러나 꼭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이라야 가치가 남고, 가공인물이면 가치가 다 사라지는 것인가? 여기서 선화공주가 상상의 소산이라면, 왜 천년 넘는 시간 동안 그런 상상이 유지되었을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백제와 신라의 결합은 전쟁이라는 유혈사태를 통해 이루어졌다. 통일이 그럴싸한 이념이나 명분으로 포장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기억 속에는 김춘추의 맹세가 자리하고 있다. 대야성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그 성주였던 사위와 딸이 비참하게 죽자, 한나절을 멍하니 있다가 백제를 멸망케 하리라던 그 맹세 말이다. 역사의 한쪽 끝에 김춘추의 맹세에 따라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는 외세의 개입에 따라) 피와 칼로써 이루어진 나·제 통합이 있었다면, 상상의 저편 너머에는 황금을 나누어 쓰고 서로 도와 큰 절을 함께 지은 사돈의 나라들이 자리한다. 선화공주는 상상 속 존재라는 이유로 사라져 마땅한 인물이라기보다, 애써 피의 칼의 역사를 치유하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아름다운 화합의 역사를 꾸며 기억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 노력의 기억과 역사를 상상에 기초했다는 이유로 없애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글픈 일이다.

  이렇게 상상을 자극하는 향가로는 <찬기파랑가>도 있다. 이 작품은 배경이라 할 만한 내용이 전혀 없이 ‘그 뜻이 매우 높았다’는 품평만이 남아 있다. 그 아쉬움 탓인지 기파랑의 일생 전체를 특정한 사상의 기준에 맞추어 상상한 소설까지 등장하였다. 기파랑의 일생 전체를 상상하는 일을 잠시 접어두면, 이 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첫 문장의 길이가 매우 길다는 것이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耆郞)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김완진 역)” 대체 8세기 중엽 정도의 이른 시기에 어떻게 시 속에 저렇게 길고도 정교한 문장이 들어갈 수 있으며, 그 하나의 문장 속에 달, 구름, 모래, 물가, 수풀 등 여러 이미지가 나란히 머물고, 그 온갖 이미지가 기파랑이라는 단 하나의 상징에 무리 없이 집중될 수 있었을까? 처음 이 시를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향가가 머물렀던 신라라는 문명의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고, 필자가 감히 현실 속의 길[道]로 선택하는 토대가 되었다. 

  향가를 통해 우리는 실증적으로 확실한, 단 하나의 정답에는 못내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처용과 서동, 기파랑에 대한 연구사(硏究史)는 현실에 존재했던 신라를 복원한다기보다는, 무리한 상상에 환상을 보태는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틀리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거나, 역으로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는 아집에 빠질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상상이 공존하는 유연한 무대를 자꾸 만들다보면 언젠가 현실 속에 향가가 되살아날 날이 오리라 믿기 때문이다. 실패한 모험이 성공의 비결이라고도 하니까.



서철원(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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